한 영혼이 있어
부모를 선택해 육신을 물려받아 이 3차원의 세상에 태어나면,
3차원 세상 어디에나 허공의 형태로 항상 존재하는 생명의 기운을 끌어들여
기氣, 정精, 신神,
그 삼위三位의 작동과 조화를 통해 체험과 배움과 깨우침의 삶을 살게 된다.
육신과 생명과 영혼의 조화는 별일을 다 만들어낼 수 있고, 별일을 다 할 수
있으며, 별일을 다 겪을 수 있을 것이나,
애초부터 시한부를 갖고 만들어진 육신의 제한과 한계 탓에 반드시 육신의 소멸이란
마지막 체험의 순간을 맞게 된다.
누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것은 원래 그렇게 되어있는 것이니 그 자체를
비통해하거나 한할 일은 아닐 것이다.
육신이 소멸할 때까지 그가 어떤 것을 체험했고 거기서 무엇을 배우고 깨우쳤든
그 또한 그의 몫이니 그 중단을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할 일도 아닐 것이다.
다만 가까이서 체험과 배움과 깨우침을 공유하는 육신이었다면 그 소멸이 참으로
비통하고 한스러울 것이나, 그 영역으로 가면 이미 누구에게 위로받을 일이 아니며
누구에게 드러낼 일은 더욱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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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남성의 성기에 비유하여 가죽맛, 살맛, 뼈맛을 말한 옛 씁쓸한 이야기를
이 게시판에 옮겼던 적이 있는데,
(옛날에 딸을 셋 둔 아비가 있었는데, 어느 명절날, 모처럼 모인 세 딸이 각각
제 남편과 \'그 짓\'에 대해 말하는 것을 엿들으니,
세째딸은 가죽맛을, 둘째딸은 살맛을, 큰딸은 뼈맛을 말하는 것에
크게 탄식하기를,
\"진정한 맛을 아는 건 큰 녀석 뿐이니 이는 필경 내 허물이구나.\"
이 아비, 갈수록 살림이 곤궁해져 큰딸은 대충 제대로 짝을 지워 시집을 보냈으나
둘째딸이 나이많은 녀석에게, 세째딸은 아예 늙어가는 녀석에게 시집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
대충 그런 얘기....)
오디오란 기기를 통한 소리 또한 그와 같이 분류할만 할 것입니다.
껍데기맛, 뒷맛, 속맛.
굳이 표현하자면,
껍데기맛은 대부분의 오디오기기들 소리일 것입니다.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그런 소리.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고 대부분은 그래야만 안심하고 수긍하며
익숙함과 친근함을 갖는 그런 소리를 뜻합니다.
흔히들 (초)고역이니 (초)저역이니 (광)대역이니를 말하는 것은 아직 이 영역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뒷맛은 비로소 공간과 배경이 펼쳐지면서 각 연주와 악기들의 제 위치가 감지되는 소리를 뜻합니다.
이때엔 껍데기맛에선 보도듣도 못한 소리도 들을 수 있으며 각 연주들이 이루어내는 화음에 때때로 오줌이라도 지릴 듯한 황홀경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이전까지 껍데기맛을 좋다고 봐온 것에 대한 자책과 탄식을 함과 동시에, 내가 드디어 오디오의 궁극에 닿았구나 싶은 착각과,
이 사실을 아직도 도탄에 빠져 허우적대는 뭇 중생들에게 널리 알려 그들을 인도하고 구제해야겠다는 미친 자만의 욕구를 제어하기 힘든 위험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뒷맛의 영역은 넓고도 넓어서 그게 진짜 뒷맛인지 착각인지 분간이 쉽지 않으며,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그들을 이 길로 이끌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착각에 가깝기 쉽습니다.
공간과 배경은 사실 무한의 영역이며, 오디오로는 영원히 그대로 구현해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속맛은 각 악기들이 선율을 타면서 연주의 감흥과 뉘앙스와 분위기까지 우러나오는 소리를 말합니다.
이 소리는 간혹 껍데기맛에서도 우러나올 수 있고 뒷맛에서도 얼마든지 감지되기도 합니다.
즉, 껍데기맛과 뒷맛이 2차원과 3차원의 문제라면 속맛은 차원과는 무관한 다른 것이라고 할만 하겠습니다.
이것은 낯설면서도 평범하고, 평범하면서도 낯설어서 껍데기맛에 길들여졌거나, 오로지 뒷만 생각 뿐인 귀엔 안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나 여깄다고, 나 좋다고 주장하지 않는 소리이기도 한 까닭입니다.
그렇다한들 그 또한 오디오 소리일 뿐이라는 것엔 변함이 있을 수가 없지요.
(남자의 그 곳이 뼈맛인들 혹은 그 이상의 맛인들 맛보고 또 맛보고 계속 마구 맛본다고 해서 그것 말고 달리 무슨 별일이 있겠습니까.)
좋고 나쁜 것은 없으며 옳고 그른 것도 없습니다.
껍데기소리든 뒷소리든 속소리든 그것을 어떻게 체험하고 거기서 무엇을 배우고 깨우치느냐이며, 그 또한 누가 뭐랄 수 없는 당사자의 몫일 것입니다.
단지 우물 안의 개구리는 육신의 소멸을 통해서만 비로소 우물 밖으로 나올 수 있겠지만,
그 전에 그 개구리의 신세를 결정하는 것은,
자기가 우물 안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아느냐, 모르느냐, 단지 그 차이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깨닫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모든 일이 달라지기 시작하긴 할 것입니다,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