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까닭은
살아있다는 것, 살아 움직인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즉 생명인데,
현대과학이 밝혀낸 생명의 본질은 형체가 없는
빛, 파장, 소리, 그 세가지의 조합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21그램이란 영화가 있었는데,
사람의 죽음 전후로 육신의 무게를 재면 그가 어떤 사람이든간에 어김없이 21g의 오차가 발생한다는
나레이션이 나옵니다.
(실제로 측정해보고 이야, 정말이잖아, 하고 싶지만 그럴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무게, 혹은 빛과 파장과 소리로 조합된 영혼의 무게가 아닐까 하는 것인데,
그 가벼운 질량을 가진 무엇이 인간의 삶을 이끌고 결정하는 것에 반복적인 의문을 던지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또 누가 말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저명한 인물이었던 것 같긴 한데,
사람은 평생에 세 가지만 잘 얻으면 그의 인생은 값진 성공을 이룬 것과 같다는 말을 남겼던 모양입니다.
그가 말한 고도리와 같은 그 세가지는,
좋은 친구, 좋은 스승, 좋은 음악입니다.
뭔가 엮이는 게 있습니다.
좋은 친구(부모자식간, 부부간, 이성간 포함)는 빛과 같습니다.
특히 부모에게 있어서 갓 태어난 자식이나, 오로지 상대만 눈에 들어오는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는 더욱 빛이 납니다.
생명을 자극하여 삶의 욕구를 건강하게 북돋는 데에 그만한 친구들은 또 없을 것입니다.
좋은 스승은 영향을 끼치고 흔적을 남깁니다. 파장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자기를 보고 배우고 깨우쳐가는 존재이므로 누구나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은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만, 과연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문이며,
생명을 자극하여 삶의 도리와 지혜를 얻게 하는 스승은 그 보다 더더욱 희귀하고 귀한 존재일 것입니다.
오죽하면 석가모니나 예수가 아직까지 인류의 스승으로 장기집권을 하고 있겠습니까.
좋은 음악은 그대로 소리입니다.
마음에 드는 소리를 얻으면 미쳐 날뛰기라도 할듯 기뻐하는 오디오쟁이는 왕성한 생명의 자극에 전율하는
것과 다를 게 없을 것입니다.
득음을 위해 폭포수를 잠재우려 실제로 피를 토해가며 발성하는 판소리꾼이나,
허공에 깃드는 연주를 꿈꾸며 손끝이 터지도록 연습을 거듭하는 바이올린 연주자나,
좋은 소리를 얻기 위해 오디오질과 듣기를 반복하며 시간을 내다버리는 오디오쟁이들은 결국
소리와 연결된 생명의 작용과 요구에 따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 태어나고 잘 죽기 위해서 삽니다.
그 작용은 생명이며, 생명은 빛과 파장, 그리고 소리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좋은 친구, 좋은 스승, 좋은 음악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러므로
그래서
그러한 까닭에
세가지 중 한가지를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파대는 오디오쟁이들은 자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정도를 추구하고 떳떳함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오디오 해서 사는 맛이 난다면 그게 곧 정도를 걷는 증거일 것입니다.
일시적으로는 누구나 그럴 수 있으므로, 지속성, 지속적인 사는 맛이 나야 합니다.
사는맛이 났다가 죽을맛이 났다가 반복된다면 그것은 소모와 낭비의 쾌감과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소모와 낭비, 고민과 고통 뿐이라면 이미 어딘가 잘못됐거나 생명의 작용과는 어긋나 있는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를
하는 증거일 뿐입니다.
생명의 작용에는 어떤 어김도 없으며,
사실은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고 냉정하며,
거기엔 어떤 설레발이나 포장이나 편법이나 답습이나 도용이나 기대나 현혹이나 망상이나 착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일반적인 현상이나 흐름이 후자쪽에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그런데,
역시 소리만이 아닌,
빛과 파장과 소리의 삼위가 일체가 되어 돌아가야 비로소 진짜 사는 맛이 날 것 같긴 합니다만,
좋은 친구나 좋은 스승은 만들거나 얻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서....
요즘,
애초엔 부탁과 당부인 줄 알았는데,
요즘엔 경고와 협박이 확실시 되기 시작한 어느 마지막 말이 자주 뒤통수를 때려
스스로 힘 좀 내보려고 공연히 끄적였습니다.
오빠, 나 없다고 막 살면 안돼.........